180530 이르쿠츠크로 가는 열차 2일차,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화장실과 샤워실.
- 29일. 하바롭스크에서 아침 열차를 타고나서..
자리를 잡고나니 내 앞자리에는 까까머리 청소년(느낌상 우리나라 고2, 3정도)이 있고, 그 윗층에는 술을 먹고다니는지 눈 언저리와 코가 벌겋게 달아오른 강인한 인상의 맞은편 청소년의 또래가 있었다. 술을 까서 먹는 건 본 적 없지만 어디선가 마시고 오는 것 같았다.
짐을 정리하는데 누가 자그마한 인절미 리트리버로 보이는 강아지를 손바닥에 얹고 지나가는 걸 봐서
???? 내가 잘 못 봤나?
했는데 정말 강아지가 이 열차에 탔었다..
그리고 바로 뒷 좌석에 한국말이 들려오고 그 일행에서 중국말도 들려오고 아니, 이건 무슨 조합? 심지어 들리는 중국말은 현지의 그 억양과 볼륨이고 또 한국말도 엄청나게 친근했다. 도대체 뭔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내 맞은편과 그 윗층과 복도를 나란히하고 눕는 누구나가 기피하는 그 자리의 두명은 모두 말이 없었다...
멍-하니 창 밖을 보면서 각자 먹을 것을 조금씩 먹는다거나 과일을 아삭거리며 먹는다거나.. 그냥 말이 없어. 어색한 침묵이 몇시간이나 지속되는 가운데 윗층에서 자그마하지만 이목구비가 오목조목하게 예쁜 누님이 내려오는데...
이 누님은 분위기 메이커였다.
어느정도냐면, 묵언수행이라도 하는 듯한 아저씨와 젊은 청년들 청소년들을 모두 커버치면서 그들의 입을 트게하고 버석거리는사막과도 같은 이 곳을 웃음꽃이 피는 행복한 열차로 바꿨다.
그리고 나에게 말을 거는데 영어 개잘해.
이렇게 영어 잘하는 러시아인 이 누나가 처음이야..
나에게 열차 생활 꿀팁과 (샤워하는 방법, 요금) 여기저기 구경도 시켜주고 머저리 같이 라면 사면서 젓가락도 없이 왔던 나를 위해 포크도 빌려줬다.
그리고 뒷 칸의 한국인과 중국인 조합의 그룹도 알게 되었는데 20대 초반의 젊은 남자아이와 또 여행하며 알게 된 한국인 누나, 중국인 누나 셋이었다.
그런데 중간의 한국인 누나가 중국어를 유창하게 해서 얼핏보면 중국인 둘에 한국인 한명의 조합 같다.
그리고 그 옆에 리트리버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동양인 생김새의 러시아 중학생?까지..
이야 역시 64인실 3등석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구나!
나도 누군가에게는 뭐여 저 몽골로이드.. 짐을 저렇게 싸들고 다니면서 러시아에 두달 있는다고? 하고 신기하게 생각되는 사람 중 하나겠지.
우리 칸의 아이돌, 인절미.
윗층 누나는 이름이 발렌티나고 카잔에 사는데 치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 결혼해서 다섯살 아들래미도 있다.
2년 전에 한국에 오면서 펜팔네 집에서 머물렀는데 인천 송도의 겁나 좋은 아파트에서 있었다고 한다. 사진 봤는데 쩌렀음;
그리고 내가 경기보러 카잔 간다니 친구 소개시켜줄테니 같이 구경도 하고 그 집에서 머물러도 된다고..
..??
그래도 돼?;;
자기 친구고 아들이 둘 있는 좋은 친구네 집이라고 한다.
아무튼 필요하면 말하라고 했으니 일단 미안한 마음에 보류.. 이 마음을 전했더니 나도 네 마음 안다면서 한국에서 펜팔 친구네서 신세질때 미안하고 그랬는데 그거는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일단 한달 남았으니 생각해본다고 했다.
그리고 사람들과 얘기하다 한국 사람들과 또 말을 나누다 강아지 구경도 하고 만지고 하다보니 시간이 10시가 넘었어..
솔직히 지루하고 멍하긴한데 그래도 시간이 가긴 가더라..
열차 칸을 이동할 때마다 지나야 하는 문이 많았다.. 화장실에 사람이 있거나 하면 다음 칸으로 이동하기도 하고 샤워하러 갈때가 고비임..ㅎㅎ
이 틈에서 담배를 많이 태운다던데 대체로 역에 정차할 때 나가서 많이 피고 여기서 흡연자를 만난 건 손에 꼽았다. 꽤 쎈 벌금을 물린다고 하지만 여기서 폈다는 무용담을 종종 듣기도..
-시베리아 횡단 열차의 화장실
우리나라에도 KTX, 새마을호, 무궁화호. 예전까지 거슬러 가자면 통일호, 비둘기호가 있듯이 열차의 상태는 복불복이다.
그러나 그나마 감을 잡을 수 있다면 열차 번호가 숫자가 낮을 수록 좋다. 같은 노선이고 번호가 다른데 이건 왜 비싸? -> 삐빅. 좋은 열차일 확률이 큽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가 만 2일 9시간을 탄 이 열차는 좋은 열차가 아니었다... 물론 이후 좋은 열차도 많이 탔지만 이번에는 '와, 그래도 러시아 열차 좋네?' 라는 생각까지 미치지 않는 열차의 화장실을 공개한다.
손 세정제와 방향제, 휴지는 거의 떨어질 일 없이 잘 채워지는 편이었다.
그러나 열차에서 가장 불편한 것이 바로 저 세면대를 사용하는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물을 쓰려면 수도 꼭지 끝에 뭐가 튀어나와 있는 저것을 위로 눌러야 한다. 손 떼면 당연히 물은 나오지 않는다 ㅎㅎ
그러므로 물 틀어놓고 양 손으로 물을 받아 세수를 한다? 안 됨ㅋㅋㅋㅋㅋㅋㅋ 그래서 한손에 받고 허겁지겁 얼굴에 물을 그냥 발라야 한다. 어푸푸 어푸푸 이런 시원한 세수는 할 수 업ㅂ어....
그런데 나중에 익숙해지면 한 손에 물을 받아서 재빨리 얼굴에 그냥 엉망진창으로 마구 바른다.
어디서는 바가지를 챙겨서 쓰면 편하다고 하던데 뭐.. 여력이 되면 챙기면 좋겠지만 바가지를 챙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머리 감는 것은 길면 무리같고 군인처럼 기장이 상당히 짧은 청년들은 머리에 물을 한껏 머금은 상태로 화장실에서 나오기도 하니 그 정도는 간단히 할 수 있나보다.
하지만 좋은 열차는 저런 수도 꼭지 끝에 달린 개폐기? 뭐라해야 하지. 저게 없당...
변기다. 앞서 남자가 볼일을 봤다면 커버가 올라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모르고 그냥 앉으면... 수 많은 남성들이 흘린 눈물들이...... 이하 생략. 나도 몇 번 당했다. 진짜 기분 째짐 ㅎㅎㅎㅎㅎㅎ 온 몸에 아드레날린이 퍼지며 갑자기 활력이 솟는다. 아오.....
볼일을 보고서 구식은 변기 아래에 발판이 있어서 그걸 누르면 된다. 좋은 열차는 벽에 있는 버튼을 누르는 형식이다. 그러면 슈우우웅-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변기 중심부가 뚫리면서 철로 아래로............. 철길이 보인다..
이런 이유로 역에 정차하기 전, 후 15분정도는 화장실을 사용할 수 없다ㅋ
- 열차에서 24시간을 보내고 열차 안에서만 이틀째가 되는 30일.
열차에서의 생활은 무료하다. 최대한 허리가 아플때까지 자고, 윗칸 사람이 내려와서 내 자리의 구석에 앉지 않는 이상 어떻게든 더 자려고 몸부림 치다 이불 뒤집어쓰고 앉아 멍-하니 시간을 보낸다.
내 자리.. 이불 커버는 더우면 그냥 저대로 쓰고 추우면 모포 가져다 씌워서 쓰면 된다.
콘센트가 없는 열차인데 내 자리에 콘센트가 있어서 여러 사람들이 꽂았다 뽑았다 북새통이었다.. 다른 사람이 꽂으려고 하는데 충전 다 된 거 있으면 알려주거나 해서 교통정리도 해줌 ㅎ
죄측에 보이는 자그마하게 튀어나온 게 테이블이다. 그 옆에 시트 포장지로 나온 비닐을 매달아서 쓰면 쓰레기통으로 만점.
이건 나중에 사진보고 뒷쪽 아자씨 인상이 무서워서 놀람..
그러다 배고프면 사왔던 빵이나 라면을 먹고 창 밖 보다가 같은 칸 한국사람들 찾아가서 근처에 빈 자리 잡고 얘기하다가..
와 진짜 생김새 난장판이다, 못 봐주겠다. 하면 거의 마지막 칸인 내 자리에서 앞쪽 1등석까지 열심히 걸어가 차장에게 샤워한다고 하고 150루블을 주고 씻는다.
사실 열차에서 씻는다는 건 생각도 못했었는데 윗층 누나가 친절히 데려가서 알려준 덕에 그나마 사람답게 될 수가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에서 샤워하기.
그런데 사실 샤워실은 현지인들은 거의 이용을 하지 않는 듯? 같은 칸의 한국사람들과 나는 하루 한번씩 이용을 했다. 이후에도 샤워는 월드컵을 위한 무료열차에서 다른 외국인이 쓰는 것을 가끔 봤을 뿐, 현지인은 마주치지 못했다.
열차 승객을 위한 편의 시설의 개념이 아니라 근무하는 차장을 위한 곳인데 돈을 주면 우리가 너네도 쓰게 해줄게. 이런 느낌이다. 샤워실은 칸마다 있는 게 아니라 열차에 딱 하나 있는데 1등석 차장실을 찾아가 차장에게 문의하면 된다. 식당칸 바로 앞 칸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리고 가서 씻는다고 무조건 그 때 씻을 수 있는게 아니라 누군가가 쓰고 있을 수도 있고, 역 정차하거나 근처거나 하면 이용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경우에는 시계를 짚으면서 이때 오라고 하는데 그 때 맞춰가서 돈을 지불하면 씻을 수 있었다.
제한 시간은 없지만 대략 15분정도 썼던 듯.
뛰는거 아니고 빠르게 걸어가는 중이다. 씻으러 가는 길..ㅠㅠ 샤워하러 5분은 잡고 이동해야 한다..
샤워실은 좁다. 샤워 칸은 더 좁다. 차장이 근무복을 다리는데 사용하는 듯 한 다리미와 함께 기타 잡다한 물품들이 쌓여있기도 하다.
물은 버튼을 누르면 30초? 가량 물이 나오는데 따스한 물은 잘 나오는 편이고 물은 바닥 구석에 뚫린 구멍으로 다이렉트로 내려가는데 열차 바닥이 그대로 보인다.. 꽃 구경, 풀 구경 가능ㅋㅋㅋㅋ
물론 수건이나 샴푸 등 기타 소모품은 개인이 챙겨가야하고 머리 말리는 건 자연 건조하거나 사람 없을때 화장실에서 드라이기를 콘센트에 꽂고 후다닥 말리면 된다.
- 두 다리로 땅을 밟는 소중함을 알려준 시베리아 횡단열차.
열차에서 하루 이상 생활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블라디보스톡-하바롭스크도 12시간 탔지만 저녁에 타서 아침에 내리는 야간열차라 자느라 그렇게 강렬하지는 않았는데 이건 진짜였다. 이런걸 블라디-모스크바까지 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정신과 육체가 엉망진창이 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다.
시간도 안 가고, 창 밖 풍경은 벌써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아는 사람도 없지.. 말을 나눠도 전부터 알던 사람들도 아닌지라 정신적인 소모가 꽤나 있었다. 자려고 해도 윗 층 사람이 내려와있으니 구석에 앉아서 졸기만 했다.
배고프니 챙겨온 음식들을 먹어도 더부룩.. 그렇다고 뭐 열차 안에서 움직이는 것도 한정적이다보니 갈수록 병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때에 보려고 ebook 단말기에 책을 잔뜩 받아갔는데 이상하게 집중도 안 되고 읽기도 힘들어서 이후에도 책 한 권을 다 못 읽을 정도였다.
게다가 열차 안이 냉난방이 되는지라 창문을 열 수 없고 통로에도 문이 열리거나 창문이 열려있지 않아 늘 답답하고 공기가 탁한 느낌이라 그게 좀 힘들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그저 조금 큰 역에 열차가 10분이상 정차할 때 내려서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이나 탄산음료를 사먹는다거나, 내린김에 바깥 공기도 좀 쐬고 운동도 하고 산책도 하는 것이었다.
열차 정차 시간은 칸마다 있는 차장실 옆에 붙여져 있으니 사진을 찍어서 확인하고 시간이 넉넉한 경우에만 내려야 국제 미아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조심, 또 조심.
역 철로 사이마다 매점이 있다. 가격은 바깥 슈퍼에서 사는 것보다 비싸다. 하지만 열차 안에서 파는 것보다는 싸서 여기서 많이 조달하는 편.. 빵, 과자, 라면 등등을 팔거나 생활용품, 장시간 탑승에 지친 아이들 달래기용 장난감 등등을 팔기도 한다. 매점의 규모는 복불복.
행상으로 꼬치나 여러 음식을 파는 분들도 있었는데 현지인들이 위생상태를 장담할 수 없다며 되도록 먹지말라고 해서 거의 라면만 먹었다 ㅠㅠ
-꼬리칸의 아이돌, 인절미.
열차를 타자마자 누군가가 강아지를 손바닥에 얹어서 다니는 걸 보고 내가 헛걸 봤나..? 했었는데 트루였다. 사람도 힘든 열차에 강아지가 타다니 ㅠㅠ
이 강아지는 우리 칸의 아이돌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귀여움을 받았다. 그래서 사진도 굉장히 많이 찍었다. 윗 사진은 갑자기 낑낑거려서 화장실 앞 쓰레기 함 위에 얹으니 볼일을 보는 똑똑함을 보여준 순간..ㅋㅋ
강아지 주인이 상당히 흡족해한 컨셉 사진이었다.
열차에서도 시간은 흐르는지라 30일에서 31일로 넘어가는 자정쯤에 치타라는 큰 도시를 들렀는데 여기 윗층 누나와 강아지를 데리고 탔던 어린 청소년이 내렸다.
사실 밤 10시가 되면 열차에 불이 꺼져서 수면 열차가 되지만 나름 친해진? 두명이 치타에서 내린다고 하니 그 둘의 도움을 받고 안면을 익힌 나를 포함한 한국인들이 내려서 배웅을 해줬다.
승강장에는 강아지와 단 둘이 긴 여정을 하는데도 씩씩하고 당찼던 그 아이의 부모님이 마중나와계셨다. 부모님은 그동안 얘기를 건네들었던지 우리들을 하나하나 두 손으로 손을 잡아주시며 고맙다고 하셨다. 아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고향의 특성이 가득 담긴 가죽 목걸이와 뱃지 등등을 나눠주고 어둡지만 무섭지 않을 승강장의 어둠 속으로 부모님과 함께 스며들었다.
윗층 누나는 만약 도움이 필요하면 러시아 사람들에게 말을 걸라고 다 도와줄거라고 하고 내가 짐이 많은게 걱정이었는지 늘 잘 챙기고 사람 많은 곳에서는 여권이나 중요한 것들을 조심하라고 했다.
그리고 마음 내키지 않는 이성이 다가오면 결혼했다고 하라면서 나름 팁을 알려주고 친구가 데릴러 왔다며 재빠르게 역으로 향했다.
잘가요 발렌티나, 크리스티나..ㅠ
마중을 하고 다시 자리로 돌아와 자려고 하는데 운이 없는 건지 블라디보스톡에서 하바롭스크로 가는 열차에서도 건너편 윗층 남자가 냄새가 엄청났는데 이 노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몸을 들척일때마다 악취가 풍겨와... 제발 150루블 아깝다고 참지말고 씻어 ㅠㅠㅠㅠㅠㅠ
제발 움직이지 말아줘, 덥다고 몸을 이쪽으로 뻗지 말아줘.. 하는 생각만 들었다.
아 그리고 내가 챙겨온 식량 중에 도시락 플러스. 라는 걸 먹어봤는데
마요네즈가.... 소스 봉지에 마요네즈가 있었다.
예전에 티비에서 마요네즈를 라면에 뿌려먹는 러시아인들을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그게 정말이었나.
반정도는 그냥 먹고 남은 것에 도전해봤는데 떡볶이에 까르보나라 소스 섞은 느낌이었다. 맵고 칼칼한 느낌의 국물이 부드럽고 덜 매워지는 느낌.
아무튼 이 날은 별 일이 없었다... 가끔 나가서 바람 쐬고 강아지 귀여워해주다 졸고 먹고 싸고 다시 자고의 반복ㅋㅋㅋㅋㅋ
그냥.. 나는 열차에 실려가는, 먹고 싸는 짐짝처럼 그저 열차 안에 있었을 뿐.. 열차가 너무나도 지겹고 할 것도 없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해보는 정도까지 이르렀다..
밤새 열심히 달리는 열차 안에서 본 달이 정말 크고 밝았다.